정의
역사
교육학적 관점
인간상
방법론
 




1) 시대적 배경
1960년대 말엽부터 70년대 초 당시 독일의 교육정책은 입문 교육분야에 관한 개혁을 앞두고 있었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기를 지내면서 그 동안 지능교육을 강조하여 취학 전 학습장 교육, 읽기 중심의 조기학습, 취학전 아동의 잠재력 테스트, 가능한 생활현장에 적응하기 등을 위주로 교육하였다. 심지어 5세 어린이를 학교 입문반에 넣으려는 움직임이 일기도 했다. 이러한 지능교육이 성행하자 한편에서는 그에 반하는 반체제 교육사조가 생겨났다. 이는 인간이 본래 선하지만, 성인들과 사회에 의해 망쳐진다는 루소의 이념을 받아들여 보다 자율적이고 어린이들의 욕구에 따라 교육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영향으로 어린이들이 너무나 방치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에 맞서 페스탈로찌(1745-1827,스위스)와 같은 이들의 교육정신이 Fröbel(1782-1852,독일)을 통해 실행되고 있었는데, 어린이들을 지능영역만이 아닌 그의 전체성안에서 바라보고, 놀이를 원래적이고 일차적인 학습방법으로 이해하면서 어린이에게 가능한 많은 공간을 주고자 하는 교육이었다. 또한 Linz의 교육자 Mater Shörl은 모든 것을 교사가 주관하는 교육 대신 어린이의 흥미를 수용하고 교사가 방침을 제시하는 “뒤에서의 인도”원칙을 옹호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교육 역시 변화된 사회 조건들에 맞추어 수정이 필요했다. 그것은 교육적 이유 이외에도 재정적 문제가 컸기 때문이다. 기존의 많은 유치원은 교회에서 운영되고 있었는데 유치원이 학교로 부속될 경우 그에 상응하는 시설이 마련되어야 하고 새로운 계획이 수립되어야 했다. 그렇게 하려면 자연적으로 부모의 부담이 커지고 그것은 기대하기가 어려운 실정이었던 것이다. 이무렵 각 주 연방들은 서로 다른 유치원법을 공포하였는데 바이어른 주는 1973년에 이를 공포하였다. 새로 설립된 조기 교육을 위한 바이어른 국가연구소는 사회변화 과정과 거기서 생긴 요청들을 조기 교육과 교양에 가늠해 연구하고, 입문교육을 위한 표준 점들을 제시해야 했다. 여기에서 수능 촉진이 어떠한 위상을 차지했는지는 그 첫 번째 작업자료중의 하나인 ‘유치원에서 초등학교로 넘어감’에 잘 나타나 있다.

유치원의 주가인상으로 어린이집들의 주요 재단인 교회는 교육지향을 쇄신해야만 했다. 즉 교회가 운영하는 유치원과 거기서 행해지는 종교교육의 특이성을 드러내는 것과 이를 위해 유치원 교사들을 양성해야하는 문제가 시급했다. 이를 위해 프라이부르크 독일 까리따스 산하 가톨릭 어린이집 중앙협회는 1973년 위원회를 소집했다. 이 위원회는 주교 관할 학교 관리들과 각 교구 까리따스 산하 유치원분과의 대표들로 구성되었다. 입문 교육 분야의 종교교육에 관련해 두 가지 안이 토론되었다. ‘트리어 계획안’과 ‘호프마이어 초안’이 나왔다. 트리어 계획안은 W. Quadflieg, Hildegard Bogerts여사와 트리어 교구의 여러 유치원 교사들과 함께 계발된 것이고, 호프마이어 초안은 트리어 계획안 이후에 Hofmeier 교수와 사회교육학자 Rosi Bichler 여사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이중에서 트리어 계획안은 가톨릭 어린이집 중앙협회의 지지를 얻었고 호프마이어 초안은 바이어른 국가 연구소의 조기교육을 위한 작업에 영향을 주었다.

 
2) 프란츠 케트와 에스터 카우프만 수녀의 만남

프란츠 케트는(1933-) 초등학교 교사였다.
그는 당시 독일의 교육 풍토에 회의를 느끼고 1972년에 일선 교직에서 잠시 휴직을 한 후 새로운 대안을 찾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그무렵 그는 뮌헨교구의 까리따스 협회의 유치원 분과 지도자 자격으로 프라이부르크에서 구성된 위원회의 위원이 되어 이러한 대안 교육을 위한 모임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는 유치원 어린이들을 위한 교리교육의 새로운 방법을 찾기 시작하였다. 어린이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무엇보다도 하느님을 느끼게 해주어야겠다고 생각하였다.

당시 독일 유치원에서 종교교육은 그저 게시판에 십자가를 걸어놓고, 아침기도하고, 간식 때 기도하고 요일을 정해서 성서말씀을 이야기해주면 충분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그러던 중 프란츠 케트는 뮌헨 프라이징 교구의 계속적인 종교교육 양성 프로그램에서 에스터 카우프만(Esther Kaufmann)수녀님을 만나게 되었다.

에스터 수녀 역시 기존의 교육 사조에 갈등을 겪고 새로운 길을 모색하던 중이었다. 그는 뮌헨 지방 근교에 있는 유치원에서 일했는데 그당시 정서불안, 외국 입양아들 등 문제가 많은 어린이들이 포함된 교실에서 가르치고 있었다.
반체제 대안 교육 모임에서 제시한 방법을 수업에 적용해 보면서 어린이들이 자유롭기는 하나 너무 공격적으로 되어가는 부작용을 체험하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이것에 만족하지 못한 에스터 수녀는 당시 오스트리아의 교육자였던 Schörl 수녀를 알게 되었다. 그는 리듬천이라 불리는 색깔의 천을 사용하여 교육을 하고 있었다. 에스터 수녀는 여기서 아이디어를 얻고 다양한 재료를 제공하며 어린이들이 자유롭게 선택하여 교육 내용을 꾸미도록 수업을 이끌어 가기 시작했다.  이 방법으로 교육을 하면서 에스터 수녀는 드디어 갈구하던 하나의 길을 찾게 되었다. 곧 실천교리교육의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수업을 하면서 늘 어린이들의 반응을 통해 수정 보완하며 방법을 굳혀하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어린이들에게서 배워서 실천교리교육을 탄생시킨 것이다.


에스터 수녀는 어린이들과 함께 작업을 해오면서 어린이들이 도저히 알아볼 수 없이 추상적으로 꾸며 놓고도, 그 의미를 물으면 구체적인 내용으로 이야기하고 그 작업을 통하여 어린이들이 그들 내면의 세계로 인도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유치원에서 에스터 수녀가 천과 여러 가지 교재들을 가지고 교육에 적용하고 있을 때, 프란츠 케트는 그곳을 방문하여 자신이 지금까지 추구하던 교육 방향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그는 깊은 신앙과 어린이들의 인격을 존중하고 직관과 창의적인 꾸미기 등으로 진행하는 에스터 수녀의 교육 방식에 크게 감동하였다. 그후 두 사람은 실천교리교육의 발전을 위해 함께 연구하기 시작했다.

에스터 수녀가 있던 유치원에서는 그동안 프뢰벨의 은물로 교육을 해오고 있었으므로 거기에 천을 첨가하여 자료를 함께 활용하였다. 실천교리교육이 제시하는 교재 중에 은물과 비슷한 것들이 있는 것은 그런 점에서이다. 그러나 그 교재가 은물자체로만 구성된 것은 아니며 개방적으로 열려 있기에 사용될 수 있는 자료들은 이 세상안에서 무한히 취할 수 있다.

3) 공동 작업의 발전

케트는 그 유치원에서 실천교리교육을 전수 받고 에스터 수녀가 이끄는 계속적 양성코스에 동반하게 되었다. 1975년 케트는 드디어 바이어른에서의 교직생활을 그만두고 본격적인 공동연구에 들어갔다. 그들은 ‘트리어 계획안’과 바이어른 국가 연구소가 제시한 ‘유치원에서 초등학교로 넘어감’을 함께 검토하면서, 새롭게 연구한 ‘실천교리교육’을 제 3의 대안으로 발전시켰다. 1976년 처음으로 교사양성을 위한 교육을 실시하였다.

그러므로 실천교리교육은 에스터 수녀가 결정적으로 이끄는 가운데 프란츠 케트와 유치원 어린이들, 계속적인 양성코스에서 만난 교사들과의 수많은 반응에서 열매를 맺은 귀납적 방법으로 형성된 것이다. 이 교육이 형성교육, 몬테소리 교육, 발도로프 교육, 심층 심리교육과 관련이 있다는 느낌을 갖기도 하지만, 이것은 어떤 일정한 이론에 의거한 것이 아니라 앞서 언급했듯이 귀납적이며 실천의 장에서 고유하게 탄생된 것이 분명하다. 또한 실천교리교육을 통하여 종교교육을 하나의 커리큘럼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고유하면서도 총체적으로 교육을 통합하는 심층적 차원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1982년 에스터 수녀는 수녀원을 퇴회하고 Maria Bronnen에 있는 다른 수녀원에 입회하게 되는데 그 수도회는 설립된지 99년째 될 무렵에 개혁된 형제 자매 수도회였다. 이곳에서 에스터 수녀는 같은 형제회의 마이놀(Meinulf)신부님을 만나 계속 연구하고 발전시켰다. 이 공동의 작업으로 드디어 1978년 출판사를 운영하여 교안내용을 수록하는 잡지(계간지이름-Religionspädagogische Praxis)을 발간하여 현재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경험과 표지, 상징을 중점적으로 사용하는 실천교리교육 방법에 교리교사들과 일반 교사와 사목활동에 종사하는 이들의 관심이 점차 커져갔고, 여러 연령층의 신앙 쇄신을 위해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이 입증되기 시작했다. 실천교리교육 방법에 의한 첫영성체 교육이 마련되기도 했고, 에스터수녀와 마이놀 신부는 피정프로그램, 견진준비 교육을 진행하기도 하였다.(현재 에스터 수녀와 마이놀 신부는 독일 Spabrücken에 있는 수도공동체에 있고. 마이놀 신부는 그곳 본당을 맡고 있다. ) 그후 에스터 수녀와 마이놀 신부, 프란츠 케트 세사람은 함께 총체적 교육인 실천교리교육을 전수하기 위해 교사들을 위한 장기간의 코스를 실시하였다.

한편 뮌헨에서는 에스터 수녀가 떠난 후 교구내 학교 분과책임자들의 지지로 Margot Eder외에 수많은 교육자, 사제, 신학자, 종교심리학자들이 연구에 가담하게 되면서 이 교육 안에 담긴 가치와 원리를 발견하여 이론적인 체계를 갖추게 되었다.